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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나를 그린 화가들] 그가 소변기에 '이름'을 붙이자 세상에 없던 '작품'이 탄생했다
2024-11-17 HaiPress
예술을 파괴한 예술가,뒤샹
◆ 매경 포커스 ◆
'샘',1950년 제작된 복제품
1917년 미국 뉴욕,공중화장실에서 볼 수 있는 남성용 소변기를 예술 전시회에 출품한 남성이 있습니다. 그는 소변기에 '샘'이라는 이름을 짓고,'R 머트'라고 서명했습니다.
'저게 예술이라고? 저런 건 나도 하겠다'는 생각을 한 독자분들이 있을 겁니다. 당시 이 작품을 받은 독립예술가협회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샘'을 전시할지 말지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졌습니다. 투표 결과 '샘'은 전시 대상에서 제외됐죠. 협회 이사회는 '샘'이 어떤 정의에 의해서도 예술작품이 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런데 협회 사람들은 생각이나 했을까요. 당시 협회 작품 설치 위원회 의장이었던 마르셀 뒤샹이 몰래 '샘'을 출품했다는 사실을요.
뉴욕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놨던 뒤샹의 '샘'은 이제 미술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이 변기가 왜 대단한 건데?'라는 질문을 하지만요. 미술계의 이단아였던 뒤샹은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습니다.
마르셀 뒤샹이 '여행가방 속 상자'를 열어 보여주는 모습
파리서 '철거' 수모당한 작품…뉴욕에선 대박
1887년 프랑스의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뒤샹은 처음에 회화로 그림을 시작합니다. 그는 군 복무를 마치고 풍자 만화와 유화를 그렸습니다. 1911년부터 뒤샹은 기계적 움직임을 그림으로 옮기는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또 파블로 피카소 등이 주도한 입체주의를 시도했죠. 입체주의는 대상을 여러 파편으로 분해한 후 여러 시점에서 본 모습을 담아내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는 이런 시도가 돋보입니다. 그는 입체주의자들이 주관한 '살롱 드 쟁데팡당' 전시회에 이 작품을 출품했습니다. 이 전시는 심사와 수상 제도를 없애 실험적인 예술 운동을 장려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하지만 전시회를 주관한 협회에선 이 작품이 입체주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여기며 철거할 것을 요구했죠. 뒤샹은 결국 이 그림을 철거했습니다. 이후 이 작품은 뉴욕에서 열린 국제현대미술전에 출품되면서 성공을 거둡니다. 파리에서 작품을 거절당한 뒤샹은 자신들을 개방적이라고 규정하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불신하게 됐습니다.
변기 출품한 미술가,예술의 독창성에 도전하다
뒤샹은 산업 시대에 생산되는 제품의 형식적 미가 기존의 조각과 회화를 위협한다고 봤습니다. 1912년 항공공학박람회에서 전시된 비행기 프로펠러를 보고 "회화는 끝났다"며 "누가 이 프로펠러보다 더 멋진 걸 만들 수 있나?"라고 말했죠.
대량 복제품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그는 소변기를 '샘'이라는 작품으로 재탄생시킵니다. 그리고 '샘'을 뉴욕의 독립예술가협회 전시에 출품했죠. 뒤샹은 '샘'을 통해 미술 작품의 개념이 확장되기를 바랐습니다. 이 협회는 엘리트주의와 상업주의로부터 자유롭고 새로운 형식의 아트 포럼을 추구했습니다. '심사위원도 상도 없다'는 것이 협회의 원칙이었습니다. 회비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작품 두 점을 무료로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샘'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협회는 육체적이고 본능적인 배설과 연관이 있는 변기가 숭고한 가치를 구현하는 미술이 될 수 없다고 봤습니다.
뒤샹은 잡지를 통해 샘을 옹호하는 글을 냈습니다. 그는 "머트 씨가 자신의 손으로 '샘'을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그는 일상적인 오브제를 취해,그것의 일상적 의미가 사라지도록 배치했다"며 "새로운 제목과 새로운 관점을 통해 그는 그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창안해냈다"고 강조했죠.
뒤샹은 '레디메이드' 개념을 미술에 도입했습니다. 이는 예술가가 직접 그림을 그리는 대신,기성품을 선택해 예술 작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예술가의 행위는 그림을 그리는 대신 오브제를 선택하고,이름을 붙이고,사인하는 행위로 대체됩니다. '샘' 역시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죠. 예술 작품의 본질은 형태,재료 등의 물질적 요소가 아니라 작가의 제작 의도 자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인데요. 뒤샹은 미술품 자체보다는 예술가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더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L.H.O.O.Q(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
모나리자 그림에 장난…'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
뒤샹은 모나리자 그림에 장난스럽게 낙서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모나리자 그림을 담은 우편엽서에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리고,그 아래 'L.H.O.O.Q.'라고 썼죠. 'L.H.O.O.Q.'를 프랑스어로 말하면 '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는 말과 동일하게 들립니다. 모나리자는 순수 미술의 상징과 같이 여겨지는 작품입니다. 제도권 미술에 속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뒤샹은 모나리자에 낙서함으로써 전통 예술을 조롱했습니다. 뒤샹은 미술가와 미술 작품을 신성시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뒤샹은 대표적인 다다이즘 작가로 분류됩니다. 다다이즘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반대하며 반문명·반합리·반미학적인 예술을 추구하던 운동이었습니다. 뒤샹은 나아가 자신의 개인적 취향이나 손재주를 작품에서 배제하고,아이디어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큰 유리'라고 불리는 '자신의 독신남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조차도'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작품은 유리판과 니스,납,호일,철사 등을 사용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나무틀과 캔버스로 대표되는 기존의 회화 방식을 버린 셈입니다.
들고 다니는 미술관
뒤샹은 자기 작품을 복제했습니다. 본인 작품의 모조품을 만든 셈입니다. 상자에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크기로 작게 아주 많이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전작을 모아 복제품 앨범의 형태로 '녹색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그가 제작한 녹색 상자 수는 보급판 300개,고급판 20개에 달합니다. 이후 뒤샹은 300개가 넘는 '여행가방 속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영업사원이 가지고 다닐 만한 가방 안에 작품을 모아둔 것입니다. 이 가방이 있다면 미술관에서 독립해 휴대용 전시를 할 수 있게 되죠. 뒤샹은 레디메이드까지 총 69점의 작품을 2차원과 3차원의 미니어처 복제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시용 상자에 넣어 완성했죠. 작은 소변기 모양인 '샘'의 복제품도 있었습니다. 24점의 고급형은 손잡이가 달린 가죽 케이스 안에 담겨 있고,300점의 일반형은 평범한 상자 안에 담겨 있다고 전해집니다.
뒤샹이 이렇게 많이 자기 작품을 복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작품이 팔리고 미술관에 들어가면,그 작품은 신성화됩니다. 뒤샹은 자기 작품을 복제하면서 산업품과 미술품,생산과 창작,대량생산과 유일성을 구별하는 태도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는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베냐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지적한 점과도 상통합니다. 베냐민은 사진과 영화가 등장하면서 예술 작품의 일회성과 진품성이 사라진다고 봤습니다. 전통적인 예술 작품에 있는 아우라가 붕괴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여겼죠.
만 레이,'에로즈 셀라비'
뒤샹의 자화상
뒤샹은 이른바 부캐 놀이를 즐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여성형 자아를 만들어 '에로즈 셀라비',또는 '로즈 셀라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R을 두 번 겹쳐 쓴 에로즈 셀라비(Rrose Selavy)는 프랑스어로 '에로스,그것이야말로 삶(eros,cest la vie)'이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셀라비로 분한 뒤샹은 여성처럼 화장하고,보석을 두르고 털목도리를 하고 여성용 모자를 썼습니다. 그의 친구 만 레이가 사진을 찍었죠. 이를 뒤샹의 자화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양성성에 관심이 있던 뒤샹은 셀라비의 이름으로 작품에 서명하기도 했습니다.
뒤샹은 1917년 뉴욕 브로드웨이의 한 사진관에서 자화상을 찍었습니다. 뒤샹은 숨겨진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다섯 번 나오게 사진을 찍었습니다. 파이프를 문 뒤샹을 다양한 각도로 볼 수 있습니다. '측면 자화상'은 1957년 그가 제작한 자화상입니다. 그는 판화 기법인 실크스크린을 활용해서 여러 장 찍어낼 수 있는 자화상을 제작했습니다. 앤디 워홀이 실크스크린을 활용해 작품을 대량 복제하기 전,뒤샹도 이 기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극비로 준비한 유작
뒤샹은 사후에도 유작으로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습니다. 뒤샹은 1946년부터 1966년까지 마지막 작품 '주어진 것'을 사람들 몰래 준비했습니다. 그는 1968년 81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요. 뒤샹의 유언으로 '주어진 것'은 이듬해 설치됐습니다. 작품을 보러 온 관객은 커다란 나무 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문은 열리지 않는 대신 내부를 볼 수 있게 작은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본 관객들은 깜짝 놀라게 됩니다. 나뭇가지와 잎 위에 마네킹 같은 존재가 벌거벗은 채 놓여 있습니다. 얼핏 보면 여성 같지만 남성도,여성도 아닌 애매모호한 존재죠. 이 사람은 등불을 들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예술이 관음증적인 욕망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관람객은 작품을 보면서 훔쳐보는 행위를 들킬 것 같은 기분이 들죠.
뒤샹은 "오늘날 예술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반종교적 임무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술 작품은 신성모독을 가장 충실하게 드러내고 내면적 통찰의 불을 밝히는 일을 계속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뒤샹의 마지막 작품은 그가 했던 말을 실천으로 옮긴 것 같습니다.
뒤샹의 예술은 난해하고 사변적이라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가 전통적인 회화의 개념을 뒤집고 현대미술의 흐름을 바꾼 것은 분명합니다. 뒤샹은 관람자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낡은 관념에 도전했고,미술계의 허위 의식과 위선을 꼬집었습니다. 오늘날 미술은 뒤샹의 작품으로부터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요. 뒤샹이 제시한 예술의 개념을 한 번 더 넘어서기 위해선,어떤 전복이 필요할까요.
'나를 그린 화가들'은 자화상을 통해 예술가의 삶과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연재입니다. 작가의 대표 작품을 함께 살펴보며 우리가 몰랐던 예술가의 뒷이야기를 파헤칩니다.
[정유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