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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노동 사이 … 무대 뒤 사람들의 긴장 흐르는 화폭
2024-12-19 IDOPRESS
박진아 '돌과 연기와 피아노' 展
'관계자외 출입금지' 푯말 뒤에
가려진 사람들의 공간 그려내
얼굴 표정은 명료하지 않지만
온몸으로 집중하는 모습 보여
1월 26일까지 국제갤러리
'분홍 방의 조명'(220X190cm). 국제갤러리
박진아의 캔버스 속 인물 얼굴엔 '표정'이 불명확하다. 돌아선 뒷모습이거나 비스듬히 선 옆모습,그도 아니면 마스크를 쓴 얼굴이어서다.
눈빛과 입매는 뚜렷하지 않아도,저들은 전신(全身)으로 말을 건다. 내면 속 심연의 한 점에 집중하고 있음이 느껴지는 데다 애써 포즈를 취하지 않은 채로 노출되는 몸짓이 그들 생각을 전달하고 있어서다.
최근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박진아 작가(사진)는 "미술관,키친,피아노 공장 등 '백스테이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렸다. 그들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staff only)'라고 적힌 푯말 뒤에 가려져 있지만 그들이 있는 곳은 늘 긴장감이 흐르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박 작가와 함께 그의 개인전 '돌과 연기와 피아노'를 약 1시간 동안 둘러봤다.
무대 뒤의 가려진 공간을 뜻하는 백스테이지는 언제나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가장 먼 공간이다. 그러나 박 작가의 손에 쥔 붓을 통해 캔버스로 옮겨진 백스테이지는 양가적 의미를 획득한다. '노동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예술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백스테이지 스태프들은 단지 한 명의 노동자도,한 명의 예술가도 아닌,그 중앙에 선 경계인인 것이다. 박 작가의 캔버스에 도도히 흐르는 긴장감은 그 경계를 염탐하는 시선으로부터 오는 듯하다.
미술관 전시장에서 분주하게 전시를 준비하는 스태프들의 뒷모습을 그린 연작 '빨간 글자' '돌 포장을 벗기고' '분홍 방의 조명' 등은 박 작가가 작년 부산시립미술관에 초대받아 그룹전에 참여했을 당시에 본 장면들을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미술관은 어디까지나 작품과 작가가 '주연'이지만 박 작가의 이 그림은 조연 역할의 직원들을 전면에 내세운 뒤 주·조연의 위치를 전환시키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주변부 직원들이 중심에 서고 관객을 만날 작품은 캔버스 속에서 철저히 주변화되기 때문이다. "하이어라키(hierarchy·계급)가 없는 수평적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박 작가의 말은 울림이 크다.
'피아노 공장' 연작은 박 작가가 독일 슈타인그레버사 내부 풍경을 그린 작품들이다.
슈타인그레버는 바이에른주 북부 바이로이트라는 도시에 위치한 피아노 회사로 전 공정이 수작업으로만 진행된다고 한다. 전통을 고수하는 슈타인그레버 직원들은 박 작가의 붓질 속에서 튜닝 렌치,클램프 등 피아노 제작 공구를 손에 쥐고 절대적인 음을 만들어내고자 정밀한 작업을 수행 중이다.
가령 '피아노 공장 06'에서는 한 여성이 검은 반팔 티셔츠를 입고 피아노 제조 공정을 진행 중이다. 검은 피아노에 아직 건반이 설치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피아노 내부를 조립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여성은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작업에 몰입 중이다. 또 '피아노 공장 07'은 수십 개의 공구들과 나뭇조각이 가득한 방을 그려냈다. 각 공구들은 쓰임을 다하면 버려질 '도구'에 불과하지만 박 작가의 캔버스 속에선 회화적인 시간성을 부여받아 영원에 머물 자격을 얻었다.
미술관 전시장이 시각적인 공간,피아노 공장이 청각적인 공간이라면 이번 전시의 세 번째 주제인 '키친' 연작은 좀 더 복합적인 감각이 결집된 장소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주방에서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팬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캔버스 밖으로 나올 것만 같다. 총천연색 음식 한 점 없는 그림에선 군침 도는 냄새가 흘러나온다.
1974년생 박진아는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런던 첼시미술대학에서 순수미술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개인전 '휴먼라이트' '사람들이 조명 아래 모여 있다' '네온 그레이 터미널' '스냅라이프' 등을 개최했으며 2010년 에르메스재단이 후원하는 에르메스 미술상 최종 후보로 선정된 바 있다고 국제갤러리는 설명했다.
전시는 내년 1월 26일까지.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