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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대공황 시기 몰락한 가장 이야기, 韓사회에도 큰 울림"
2025-01-16 HaiPress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연출 김재엽
자본주의 비인간성 드러내고
가부장 강요당하는 남자 고통
사실적 연출로 극대화해 전달
희곡 거장 아서 밀러의 대표작
퓰리처상·토니상 등 휩쓸어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의 한 장면. 쇼앤텔플레이·T2N 미디어
연극이 시작되면 양손에 가방을 하나씩 든 남자가 나타난다. 가방들은 너무 커서 구부정한 어깨에 과도한 무게를 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불황 속에서 위기를 겪고 있는 그는 지친 걸음으로 집 안에 들어선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지만 그의 마음에 또 다른 무거운 짐을 얹는 곳으로.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연출한 김재엽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는 작품이 가진 동시대성을 설명했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두 가지 차원의 현재적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불안정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남편과 아버지,아들이 강요받는 가부장적 남성상을 지적하는 것이죠."
'세일즈맨의 죽음'은 경제 대공황 시기 미국의 세일즈맨이자 중산층 가정의 가장인 윌리 로먼(박근형·손병호)의 몰락을 그린 작품이다. 미국 현대 희곡의 거장 아서 밀러의 대표작으로 퓰리처상,토니상,뉴욕 연극 비평가상을 모두 받았다.
김 연출은 '세일즈맨의 죽음'이 가진 보편성으로 먼저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성을 나타내는 것을 꼽았다. 대공황 시기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1949년 초연된 작품이지만 현대 한국의 자본주의에도 적용되는 울림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세일즈맨의 죽음' 연출 김재엽. 김호영 기자
그는 "자본주의는 (경기) 사이클이 있으니 불안정함이 늘 존재하고 이는 외환위기와 금융위기,코로나19 사태를 겪어온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라며 "저널리즘적 요소를 갖춘 르포 문학에 가까운 작품으로서 '세일즈맨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일즈맨의 죽음'이 가진 또 다른 보편성은 가부장제와 남성성에 대한 이야기다. 윌리는 사랑하는 아내 린다(손숙·예수정)와 아들 비프(이상윤·박은석),해피(김보현·고상호)가 있지만 행복했던 과거와 달리 이들과 출구가 보이지 않는 갈등을 겪고있다. 특히 촉망받는 미식축구 선수였다가 변변치 않은 막노동꾼이 된 장남 비프에게 짙은 애증을 투사한다. 연극은 오랜 기간 집을 나갔던 비프가 돌아온 며칠간 벌어지는 사건들과 수십 년 전 두 사람의 관계를 어그러지게 한 비밀을 추적한다.
김 연출은 "어린 시절 부친을 잃어 아버지 없이 자란 윌리는 늘 좋은 아버지가 되려 하고 아들들을 성공한 남성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며 "비프와 해피 역시 많은 돈을 벌어 결혼하려 하는 등 가부장적 남성상을 획득하려 하는 인물들이고,이는 맨박스(남성들에게 강요되는 '남성다움'의 개념)에 갇힌 한국 남성들에게도 메시지를 준다"고 말했다.
200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희곡 '페르소나'로 데뷔한 그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연극들을 무대에 올려왔다. 대표작 '알리바이 연대기'(동아연극상·대한민국연극대상 수상)는 재일교포였던 자신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조명했고,그가 이끄는 극단 드림플레이 테제21의 '자본' 시리즈는 렉처 퍼포먼스와 다큐 드라마 등 형식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파헤쳤다.
그의 작업은 '다큐멘터리적 연극'으로 특징지어진다. 동시대성과 실제성을 살린 연출로 관객과 무대가 만나는 연극의 현장성을 강화하는 방식이다. 그는 "동시대 관객들은 극장 밖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연극을 이해하기 마련"이라며 "관객이 자기 삶의 모순을 무대에서 확인하면 연극만의 리얼리티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감각적 경험 또한 현장성을 강화하는 요소 중 하나다. 이번 '세일즈맨의 죽음'은 지난해 공연(연출 신유청)과 달리 무대에 실제 흙밭을 설치해 배우가 씨앗을 심는 모습을 연기했고,실제로 담배(금연초)에 불을 붙여 피우는 모습을 연출해 관객에게 사실적 감각을 제공한다. 그는 "무대의 물질적 감각은 영상 매체 등과 구별되는 연극의 현장성을 확장한다"고 말했다.
극작과 연출을 모두 하는 그는 '세일즈맨의 죽음' 이후 자신의 연극 세계를 되돌아볼 계획이다. 오는 4월 개막하는 연극 '베를리너'를 연출한 뒤 안식년인 하반기부터 외국에 나가 새로운 작품과 연출 방식에 천착한다. 그는 "'세일즈맨의 죽음'을 작업하면서 희곡이 완벽하고 훌륭한 배우들이 무대에 서면 작품의 완결성이 저절로 갖춰지는 것을 경험했다"며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강조한 작품보다는 조금 더 보편성 있는 드라마를 연구하려 한다"고 말했다. 공연은 3월 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김형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