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운의 히코노미] 축복과 같은 은광산의 발견 제국이 무너지는 단초였다

2025-04-27     HaiPress

스페인 역사속 자원의 저주

◆ 매경 포커스 ◆


미국 화가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가 1859년 그린 '안데스의 심장.'

고고한 산. 육중한 사내들이 비오듯 땀을 쏟으며 한 발짝 한 발짝 정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몇 날 며칠 이어진 고난의 행군. 지칠 대로 지쳐버린 몸뚱이. 이들이 발걸음을 뗄 수 있었던 건,저 산을 오르면 진귀한 보물이 가득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망망대해 대서양마저 건너 새로운 땅에 발을 디딘 이들. 태산이 높다 한들 대수겠습니까. 그토록 찾아 헤맨 보물이 눈앞에 있는데.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그들을 맞이한 건 은으로 가득한 광산이었습니다. 누군가는 환희의 눈물을,또 누군가는 기쁨의 포효를 질렀습니다. 전설의 황금도시 엘도라도(El Dorado)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였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에서 출발해 볼리비아의 은 광산을 발견한 정복자들,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의 이야기입니다.


말을 타고 있는 카를 5세.

엄청난 은화가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으로 전해집니다. '제국' 스페인은 이제 지구의 최강자가 될 준비를 마쳤습니다. 신은 그러나 스페인의 뱃머리를 '망국의 길'로 돌렸습니다. 은(銀)이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되면서였습니다. 스페인이 망국으로 빠진 역사는 부의 근본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열쇠입니다.


절반의 세계를 찾은 콜럼버스


"세계와 세계가 만나다."


1492년. 세계가 또 다른 세계를 만난 해입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마침내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거인의 뒤를 따라 수많은 사내들이 배에 올라탔습니다. 신대륙에 황금빛 도시가 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은 뒤였습니다.


왕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금빛 가루를 뒤덮고 있고,금이 지천에 널려 있는 황금의 도시. 야망으로 가득한 사내들의 가슴이 두근거리기에 충분합니다. 잉카를 무너뜨리고 금의환향한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1534년 왕에게 황금을 조공합니다.


포토시 조폐국에서 1768년 주조된 동전.

수많은 탐험가가 드넓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건 황금도시 엘도라도를 발견하겠다는 야망 때문이었습니다. 누군가는 꿈 깨라,망상이다 했지만 야심은 단단해져만 갑니다.


인도로 가는 새 길을 발견하겠다는 콜럼버스를 비웃던 사람들은 모두 합죽이가 되었습니다. 제2의 콜럼버스가 될 수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엔트라다(Entrada·탐험을 의미하는 스페인어)'의 시작이었습니다.


도전은 멈출 줄 몰랐습니다. 기어이 일련의 사내들이 안데스 산맥을 오른 끝에 은 광산을 발견합니다. 세계 최대 규모였습니다. 볼리비아 포토시였습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이 산에 '세로 리코'라는 애칭을 붙였습니다. '부유한 산'이라는 의미였지요.


무적함대의 파괴를 묘사한 후대 스페인 화가 호세 가트너의 1892년 작품.

세계 최대 은광 발굴


스페인에는 그야말로 금은보화가 넘쳐났습니다. 멕시코 아즈텍 제국을 무너뜨리고 찾은 황금과 포토시에서 채굴한 은화가 스페인에 넘실댑니다. 은의 도시 포토시는 사람과 물산으로 가득합니다.


어느새 아메리카 대륙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성장합니다. 스페인이 이곳에 은화 주조소를 건립합니다. 제국에 통용되는 은화를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왕이었던 카를 5세는 환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제국을 운영하는 데 드는 엄청난 재정적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였습니다. 가톨릭에 대한 절실한 믿음이 마침내 응답받았다고 그는 여겼지요.


'신의 선물'인 은화는 응당 신을 위해 써야 했습니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개신교도들을 혼내주는 일이었습니다. 교황을 배신하고,이교도적 믿음을 가진 존재들. 그들을 쓸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카를 5세 인생의 제1목적이었지요. 넘치는 은화는 시민을 위해 쓰이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용병과 군인에게 흘러갑니다. 끊임없는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지급할 은화가 부족해지자 왕은 포토시 관리들을 더욱 채근합니다. 더 많은 은을 채굴하라고,더 많은 돈을 본국에 바치라고.


카를 5세가 죽은 뒤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들인 펠리페 2세 역시 아버지와 비슷한 전철을 밟았기 때문입니다. 은화가 주는 풍요에 취해 전쟁과 향락에 빠지는 일. 엄청난 은화량에도 불구하고 1557년부터 몇십 년 시차를 두고 세 차례나 채무 불이행을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경제위기에도 펠리페 2세의 국정 운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 국가의 맏형으로서 유럽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대외적으로는 전쟁을,대내적으로는 가톨릭적 권위를 세우기 위한 과시용 예술에 돈을 쏟아부었습니다. 엘 그레코,디에고 벨라스케스,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이라는 걸출한 화가들이 스페인 회화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몰랐습니다. 황금시대(Siglo de oro)를 맞은 예술은 반짝거렸지만,경제는 금은보화의 독에 취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왕인 카를로스 2세.

은의 저주가 시작되다


폭포수처럼 들어온 은화는 축복의 탈을 쓴 저주였습니다. 돈으로 해결한다는 배금주의가 스페인 경제를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장에 돈이 넘쳐날수록 노동의 가치는 폄훼됩니다. 농산물이든,공산품이든. 왜 그걸 힘들게 생산합니까. 넘치는 은화로 외국에서 사오면 그만인 것을.


노동의 근면함과 상인의 반짝이는 창의가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스페인이 걸린 덫이었습니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가 척박한 국토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무역과 제조로 부를 일굴 때,스페인은 '은의 늪'에 빠지고 있었습니다.


민간경제에도 서서히 청구서가 도착합니다. 실물경제에 기반하지 않은 막대한 화폐는 재앙에 가깝습니다.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포토시 은 광산을 발견한 이후 약 100년에 걸쳐 물가는 45배 이상 오른 것으로 분석됩니다.


펠리페 2세 치세 마지막 동안에도 곡물 가격이 4년 만에 45%나 올랐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먹고사는 시민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수치입니다.


적국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달랐습니다. 두 나라를 지탱하는 건 왕도 은화도 아니었습니다. 상인과 무역업자였습니다. 시장과 금융기관이었습니다. 1588년 잉글랜드 함선이 무적함대를 무찌릅니다. 1648년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을 쟁취합니다. 세계를 호령하던 스페인은 여명 속에서 저물고 있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여전히 은화로 가득한 배가 대서양을 건너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빚을 갚는 데 사용됩니다. 경제가 무너지고 있었지만 카를로스 2세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생식능력도 부족한 탓에 갖은 애를 쓰고도 후사를 남기지 못합니다. 1700년 11월 결국 그가 세상을 떠납니다. 39세의 나이였습니다.


이듬해 오스트리아,프랑스를 필두로 전쟁이 벌어집니다. 스페인을 차지하기 위한 대혈투,'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었습니다. 이때 프랑스 루이 14세의 군대가 승리를 거두고,자신의 손자를 스페인 왕좌에 앉혔습니다. 지금도 스페인 왕가가 프랑스계인 '부르봉'(스페인어로는 보르본) 왕조인 이유입니다.


스페인 몰락이 말해주는 것


19세기 스페인의 역사책에는 피비린내가 가득합니다. 영광의 빛과 환희에 찬 웃음소리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1808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하면서 경제는 더욱 무너집니다. 남아메리카에서 본격적인 독립전쟁이 뒤를 잇습니다. '종이호랑이' 스페인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영국을 선두로 모든 유럽 국가들이 '제국'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상업·무역·산업혁명을 토대로 만든 질서였습니다. 스페인은 여전히 낡은 농업에만 의존하는 후진국이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했을 때 그들은 외려 땅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1898년 후발주자인 미국에 패배하면서 식민지 필리핀과 괌도 잃었습니다.


제국이 무너진 건 역설적으로 모두가 축복이라고 했던 은광의 발견이었습니다. 은광과 금을 발견하지 않았다면,어쩌면 스페인은 제법 괜찮은 역사를 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페인판 '자원의 저주'였습니다.


자원의 저주는 지구 곳곳에서 목격됩니다. 그 어떤 나라도 자원의 발견만으로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네덜란드도 1959년 북해 앞바다에서 가스전을 발견해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였지만,역설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잃었습니다. 경제라는 반석은 언제나 인간의 땀,눈물,창의를 통해서만 다져집니다. 부유층이 슈퍼카를 탄다고,럭셔리한 호텔에 산다고 중동 산유국을 선진국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입니다.


다시 국부를 생각합니다.


경제란 무엇입니까. 자식에게 밥을 먹이겠다는 가난한 부모의 숭고함입니다. 늠름한 남자가 되어 괜찮은 아내를 맞겠다는 사내의 욕망입니다. 나라에 기대지 않고 살겠다는 시민의 자존심입니다. 이 모든 것이 혁신의 밀알이 되어 국부를 이룹니다.


대한민국에서 누리는 근사한 것들에서 저는 앞선 세대의 땀냄새를 맡습니다. 선혈 가득한 핏자국을 떠올립니다. 숭고한 희생이 없었다면 피와 땀은 제가 흘려야 했을 것입니다. 자원 하나 없는 척박한 이 땅을 부국으로,또 선진국으로 일궈낸 그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히코노미는 경제라는 어려운 식재료를 역사라는 맛있는 양념으로 요리해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경제 근육을 키워드리겠습니다.



[강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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